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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구

모차르트의 생애, 주요작품,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by Culture오아시스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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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궁정 음악가 살리에리(1750~1825)가 어느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향하 질투심으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그의 고백은 영화를 보는 관중에게 미움이 아니라 연민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마도 천재가 될 수 없어 느끼는 보통 사람들의 절망을 웅변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리에리에게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가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잘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음악의 신동이었던 모차르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볼프강 모차르트의 일러스트

생애 

모차르트는 1756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슬라텐바흐 대주교의 궁정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였습니다. 그에게는 7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불행히도 다섯 아이를 잃었습니다. 딸 난넬과 막내 볼프강만 살아남았고 그는 두 아이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 그만큼 엄격한 음악 교육을 시켰습니다. 볼프강은 이미 여섯 살에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금방 익혀 연주하고, 여섯 살에 이미 협주곡을 작곡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자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딸 난넬과  여섯살인 볼프강을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도착한 모차르트 일행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당시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했습니다. 첫 번째 연주여행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모차르트 일가는 계속 유럽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이 여행을 통해 볼프강은 여러 나라의 음악가들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애, 독일에서는 교향곡에 심취하는 등 볼프강은 빠르게 음악지식을 흡수하며 작곡공부를 이어갔습니다. 볼프강은 여덟 살 때 첫 교향곡을 , 열한 살 때 첫 오페라를 작곡했고, 15세 이전에 소나타, 교향곡, 오페라까지 백 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습니다. 그는 점차 꼬마천재 연주가에서 위대한 작곡가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천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까.  인격적으로 성숙할 틈도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탓이었는지 볼프강 모차르트는 그닥 사회성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외모에 열등감을 갖기도 했고 주위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천재 특유의 고집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모차르트에게는 유달리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주요 작품

모차르트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어서 궁정음악가로 얽매이는 삶을 원하지 않아 독립 음악가로 활동했는데 이는 모차르트가 자존심이 강해서 귀족들이 음악가들을 하인처럼 다루는 것을 참을 수 없어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신 유럽사회의 변화가 음악가의 독립을 지지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왕과 귀족의 힘을 약화시킨 대신 중산층 시민의 힘을 강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경제력을 갖게 된 시민들이 평등사상을 외쳤고 이는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음악가들도 더 이상 왕과 귀족의 하인처럼 살기를 거부하고 경제적인 독립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찾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자유를 찾은 대신, 궁정을 벗어난 음악가들은 고정적인 수입을 잃고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빈으로 간 모차르트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돈 지오반니>를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얼마 못 가 벌어들인 돈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모차르트 자신도 경제 감각이 없는 데다가 아니 인 콘스탄체도 낭비벽이 심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곧 빚더미에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충격과 상심으로 모차르트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모차르트는 이 시기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교향곡 39,40,41번>을 작곡했고, 힘들게 병마와 싸우며 죽음을 맞이하던 해에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와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곡 <레퀴엠>을 완성했습니다. 1791년 모차르트는 35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인류역사상 최고의 천재 음악가였던 모차르트의 가는 길은 장례 치를 돈조차 없이 가난해 묘비 하나 없이 쓸쓸하게 묻혔다고 전해집니다. 

업적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모차르트는 소나타와 협주곡, 교향곡과 오페라 등 매우 다양한 장르의 곡을 수없이 작곡하였습니다. 특히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고전주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고전파 음악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자유를 추구했습니다. 타락한 귀족을 비웃는 내용의 <피가로의 결혼>이나 <돈 지오반니> 등을 통해 귀족을 적으로 두면서까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비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두 작품은 이후에 만들어진 <마술피리>와 함께 모차르티의 3대 오페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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