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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구

헨델의 생애, 작품,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by Culture오아시스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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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은 바흐와 함께 서양 음악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음악가입니다. 클래식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보통 무엇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을 무엇의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지요, 바흐와 헨델이 인류 역사에서 음악을 처음 시작한 음악가들은 아닌데도 왜 이 두 사람에게는 왜 이런 별칭이 붙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흐와 헨델이 서양 음악을 크게 발전시켜 후대 고전파 음악의 발판을 마련했던 음악가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두 음악가 중,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헨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내용은 이원숙 · 정명근 님 공저 <음악이야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헨델 초상화

 

생애

헨델은 1685년 독일의 할레에서 음악과는 아무 상관없는 작센궁정의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어 했으나 아버지는 헨델을 법관으로 키우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음악공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린 헨델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다락방으로 올라가 달빛에 악보를 읽고 연주법을 익혔습니다. 마침내 헨델의 재능은 주위에 드러나게 되었고 9살 때부터 작곡법과 오르간 연주법을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법과대학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1년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자유분방했던 헨델은 독일을 답답하게 느껴 외국으로 나갔고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접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배운 헨델은 고국으로 돌아왔다가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영국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돈과 명예를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여건에 반해 영국에 눌러앉아 나중에 영국인으로 귀화합니다.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갈고 닦았던 음악실력을 영국에서 발휘했습니다. 음악으로는 돈을 벌지 못한다고 걱정했던 아버지의 기우를 뒤로 하고 음악을 사업으로 연결시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대규모 연주회를 열고, 직접 오페라단까지 만들어 음악 사업을 벌여 자주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헨델은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각 나라 음악의 장점을 익혀 자기만의 음악으로 만들어냈고 그 결과 대중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온갖 기교를 추구했던 헨델의 음악은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며, 덕분에 그는 평생 왕과 왕비의 후원을 받고 오페라 공연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여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한 곳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던 성격 탓이었는지 헨델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유럽각국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았으나 돌팔이 의사에게 엉터리 치료를 받은 탓에 말년에 시력을 잃고 175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품

오페라 : <알미라 1705>,<리날도 1711>, <쥴리어스 시저 1724>, <로델린다 1725>, <오를란도 1732>, <아리오단테 1735> 외

오라토리오 : <아틸리아 1733>, <알렉산더 축제 1736>, <사울 1739>,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1739>, <메시아 1742>, <삼손 1743>등 30곡 이상 

교향곡 : <수상의 음악 1717>, <6개의 콘체르토 그로소 1734>, <왕궁의 불꽃놀이 1749>, 오르간 협주곡, 모음곡, 무곡, 서속 등

실내악 : 2중주 소나타, 리코더, 플루트,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들 

건반악기 : 하프시코드 모음곡, 전주곡, 푸가 등

그 밖에 100곡 이상의 이탈리아 칸타타 및 다수의 3 중창, 2 중창곡이 있다

 

업적

영국에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헨델은 많은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고, 궁정용 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이후 영국 귀족들이 영국오페라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창립한 '로열 아카데미'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헨델은 유럽 전역을 돌며 가수를 모집하고 세트 디자이너 등의 기술진을 기용하여 1720년 개관합니다. 개관 기념 두 번째 오페라로 발표한 <라다미스토>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헨델의 가장 훌륭한 오페라로 인정받는 <쥴리어스 시저>와 <로멜린다>도 이 시기에 작곡, 발표합니다. 

 

런던에서 크게 환영받고 사랑받았던 오페라는 1730년대에 이르러 차츰 인기를 잃어 로열 아카데미도 폐관하게 됩니다. 헨델은 1741년 결국 오페라 작곡을 중단하고 대규모의 성악곡들과 성경을 주제로 한 오라토리오를 발표하여 다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많은 기악 작품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는데, 특기 1742년 4월 13일 헨델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메시아> 의 첫 연주를 성황리에 치르면서 그의 인기는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이 공연에서 청중들이 너무도 감동되어 합찬단이 <전능의 주, 우리들의 하나님이 통치하시다>를 부를 때 영국 왕을 위시해 청중 모두가 합창이 끝날 때까지 기립하였고 그때부터 영국에서는 메시아의 이 부분이 연주될 때 기립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돈벌이에 지나친 관심을 쏟아 '음악을 돈에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음악가들이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작품을 활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며 헨델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속에서 자신의 음악 작품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헨델의 상업적인 활동은 그가 자신의 작품을 대중과 만나게 함으로써 음악의 보급을 촉진했고, 그 결과 그의 음악이 보다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을 수 있었습니다. 헨델의 음악을 판매하고 수익을 얻었던 것에 대한 비판은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감안해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헨델이 벌인 여러가지 사업덕분에 음악의 대중화가 활성화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바로크 음악을 완성한 거장으로서 헨델은 동시대를 살았던 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불립니다. 바흐가 주로 기악곡과 종교음악에서 큰 업적을 남겻다면, 헨델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같은 극음악 쪽에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오라토리오 메시아는 초연 후 지금까지 유럽 문화권에서 한 해도 연주되지 않았던 적이 없는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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